초벌번역을 새벽 5시가 다 되어서 끝냈다.
난 새벽 3시를 넘기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옆에 있던 읽던 책 중 한 권을 집어 들고 읽었다.
그게 바로 윤오영 선생의 수필선집 <곶감과 수필>이다.
윤오영 선생의 글은 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분명 많이 봤을 것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 '달밤', '소녀', '마고자' 등이 교과서나 문학책, 언어영역 문제집에 꼭 있었다.
"쌀이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라는 방망이 깎던 노인의 대사는 아마도 익숙할 것이다.
수필은 외국 것만 좋다고 하던 시절, 윤오영 선생의 글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모양이다.
우리네 정서에 맞는 생활 속의 소재와 역사 속의 소재로 향수는 물론 때로는 교훈마저 불러 일으키는 글을 썼으니 아마도 당연할 것이다.
또한 윤오영 선생의 글은 이제 고전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내가 알기로 고전은 고금을 넘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교훈을 주는 글이다.
적어도 나에게 윤오영 선생의 글은 그러했다.
처빈난의 다음의 구절은 허례허식에 눈이 멀어, 가산을 탕진하고, 기쁜 날을 무거운 날로 바꾸는 우리네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로하는 부부가 있어 건강한 몸으로 환갑을 맞이했다. 이에서 기쁜 일이 없다. 매일 먹던 음식도 이날 따라 별미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이날 따라 신광에 빛날 것이다. 두 늙은이 겸상을 받고 서로 행복을 다짐하는 기쁨이 크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잔치상 못 차리는 것을 크게 여겨, 기쁜 날을 괴로운 날로 바꾸려는가.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백년가약이 성취되어 화촉을 밝히니 이에서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으랴. 냉수 한 그릇의 맑은 정성이 얼마나 성스러우며, 평소에 입던 옷을 다시 빨아 다렸을망정 이날 따라 얼마나 호사로우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호화로운 식장과 성대한 주연과 화려한 성장을 부러워하여 일생의 기쁜 날을 놓고 고민으로 바꾸려는가.
(중략)
가족의 굶주리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마음에 없는 짓이나 비루한 웃음이라도 웃어가며 살아야 할 것이니 개성이나 자존심만을 싸 가지고 지낼 수도 없다. 여기에는 최소한의 타협은 필요하리라. 그러나 죽을 밥으로 바꾸기 위하여 누추한 셋방을 깨끗한 저택으로 올리기 위하여 대단스럽지도 못한 남들과 어깨를 맞추기 위하여 자기의 신조와 고집을 꺽고, 한가로운 자유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저 구절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신의 평안을 위하여 국가와 사회에 눈감는 지성인들에게도 윤오영 선생은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명분 이라는 수필의 다음의 구절을 소개한다.
선비에게는 권력이 없고, 명예가 없다. 그러므로 책임과 의리의 두려움도 없다. 그는 세상의 불행을 위하여 목숨을 대신 바쳐야 할 책임이 없고,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끊어야 할 의무가 없다. 만인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의무가 없고 역사의 죄를 받아야 할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지식인이다. 스스로 양식을 저버릴 수 없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것이 곧 선비의 명분인 것이다.
(중략)
지성인의 힘은 가장 미약한 듯 가장 강인하고, 그의 책임은 가장 적은 듯 가장 무거운 것이다. 위정자는 그 업적에서 공과가 평가될 수 있다. 지도자는 최후의 의리에서 모든 평가가 결정된다. 그러나 선비는 평범한 일동일정(一動一靜)에서 그의 개결한 것과 순정한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위정자나 지도자의 한 번 저지른 과오는 결코 그 책임이 용서되지 않지만, 무명의 선비의 과오라면 반성과 회오(悔悟)와 개선과 근신에 의해서 스스로 회복되는 것이다. 여기에 게으른 것만이 최대의 과오인 것이다.
나는 분(糞)의 구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향기없는 가란(假蘭)들이 난(蘭)으로 불리는 것을 오직 슬퍼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교훈을 주며, 또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고, 딱딱한 교실에서의 정해진 결론의 도출에 그치던 국어교과서 지문이 아니라, 다시금 그 글을 다른 맛으로 접하게 해주는 이 책을 구입하고, 읽은 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하는 바이다.